퀘벡이라는 완벽한 피사체
‘단풍은 역시 캐나다’라는 뻔하디뻔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진부함으로 뭉뚱그리기엔 캐나다의 가을이, 퀘벡을 수놓는 단풍의 존재감이 실로 남다를 뿐이다.
광막한 영토를 품은 나라에선 계절이 피고 지는 데도 시간차가 존재한다. 캐나다의 가을은 지역에 따라 빠르게는 8월 말부터 시작해 11월까지 이어진다. 날씨에 따라 단풍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는 매년 다르지만 보통 ‘9말 10초(9월 말부터 10월 초)’ 공식을 따른다. 조건반사적으로 빨간 단풍잎이 먼저 떠오르지만, 캐나다 서부의 가을 색은 황금빛으로 정의된다. 싱그러운 초록빛에서 서서히 샛노랗게 물드는 라치(Larch) 나무가 앨버타주와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산천을 눈부시게 채운다. 퀘벡주와 온타리오주를 품은 동부는 ‘불타는 단풍(Burning Maple)’의 연속이다. 나이아가라폭포에서 시작해 토론토, 오타와, 몬트리올을 따라 장장 800㎞에 달하는 메이플로드는 붉디붉은 파도가 물결친다. 그리고 퀘벡에 이르러서야 대단원의 단풍 여정은 해피 엔딩을 맺는다.
여전한 추억앓이
‘캐나다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북미 대륙 유일의 성곽도시’, 영어보다 프랑스어가 일상적으로 들리는 ‘캐나다 속 작은 프랑스’라는 수식어는 어쩐지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우리에게 퀘벡은 드라마 <도깨비> 속 촬영지로 더 친숙하다. 그냥 알고 지내던 사이에서 베프가 된 것처럼, 퀘벡은 단숨에 판타지 가득한 낭만 도시로 등극했다. 드라마가 끝나고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퀘벡을 찾는 이들은 여전히 드라마 속 장면을 찾아 추억앓이 중이다.
퀘벡은 성벽을 기준으로 바깥쪽의 신시가지, 안쪽의 구시가지(올드 퀘벡)로 나뉜다. 여행의 방점은 올드 퀘벡에 찍힌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올드 퀘벡은 크게 언덕 윗마을인 어퍼타운과 아랫마을 로어타운으로 구분된다. 어퍼타운은 교회나 시청 같은 공공건물이, 로어타운은 관광객이 좋아할 만한 상점과 식당으로 가득하다. 올드 퀘벡의 진입로인 생루이 게이트(Porte Saint-Louis)를 지나면 옛 프랑스를 그대로 옮겨다놓은 듯한 아기자기한 유럽풍 건물이 타임 슬립을 한 느낌을 준다.
어퍼타운의 중심은 퀘벡의 심장이라 불리는 샤토 프롱트낙(Château Frontenac) 호텔이다. 언제 어디서나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 도시의 나침반 같은 존재다. 웅장한 유럽 성채를 방불케 하는 100년 넘은 건물은 ‘세계에서 가장 사진이 많이 찍힌 호텔’로도 유명하다. 짙푸른 네이비색 세인트로렌스 강을 배경으로 샤토 프롱트낙은 고고한 자태를 뽐낸다. 호텔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뷰 포인트는 뒤프랭 테라스(Dufferin Terrace)를 걸어 바스티옹 드 라 렌 공원(Parc du Bastion de la Reine)에 오르는 것이다. 우리에겐 ‘도깨비 언덕’으로 친숙한 드라마 속 촬영지로, 이른 아침부터 일몰 후 야경까지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모든 날 모든 순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황홀하다.
세인트로렌스강과 인접한 로어타운의 루아얄 광장(Place Royale)과 프티샹플랭 거리(Rue du Petit-Champlain)는 올드 퀘벡의 정체성을 함축한다. 특히 루아얄 광장은 유럽인이 퀘벡에 처음 정착한, 퀘벡 시티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역사적 장소다. 오목조목 조약돌이 깔린 소박한 광장은 느긋한 정취를 느끼기에 더할 나위 없다. 광장에서 도보로 1분 거리에 자리한 프레스크 데 퀘벡쿠아(Fresque des Québécois)는 5층짜리 건물 외벽 한 면 전체가 생생한 입체감을 자랑하는 벽화로 가득한 기념사진 명소다. 프티샹플랭 거리는 북미에서 가장 오래된 쇼핑 거리 중 하나다.
조약돌이 촘촘히 박힌 100m 남짓한 골목을 따라 세련된 부티크 숍과 카페, 레스토랑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플랫 화이트 커피 한잔을 손에 쥐고 햇살 쏟아지는 거리를 걷다 보면 이 도시에 살고 있는 현지인이 된 기분이다. 딱 두 번, 관광객 모드가 발동되는데, 퀘벡 여행의 스테디셀러 기념품 메이플시럽을 살 때와 드라마 <도깨비>에서 퀘벡과 서울을 연결하던 빨간 문 앞에서 인증샷을 찍을 때다. 인증샷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으면, 구글맵에서 ‘Goblin Red Door’를 검색하면 정확한 위치가 나올 정도다.
인생 단풍을 만나고 싶다면
단풍 여행의 완벽한 타이밍을 잡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면 불가능하고, 가능하다면 또 가능한 얘기다. 퀘벡주관광청은 홈페이지(www.bonjourquebec.com)를 통해 일주일마다 퀘벡주 각 지역의 단풍 상태를 업데이트한다. 날씨가 변수이긴 하지만, 적어도 단풍의 최적기를 가늠해볼 수 있어 인생 단풍을 만날 확률도 그만큼 높아진다.
퀘벡 시티에서 1시간 남짓 달려 대교 하나를 넘으면, 목가적인 분위기의 오를레앙섬(Île d’Orléans)에 닿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거라곤 드넓은 초원과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작고 소박한 농장이 전부다. 마치 노이즈 캔슬링으로 외부 소음을 차단하기라도 한 듯 고요한 풍경이 이어진다. 가을걷이에 한창인 들판과 농익은 단풍은 이름 모를 화가가 정성 들여 그린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직접 수확한 작물로 수제 잼과 과실주를 만들어 파는 농장의 기념품 숍을 구경하는 재미도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
오를레앙섬 초입에 자리한 몽모랑시폭포(Montmorency Falls)는 현지인도 즐겨 찾는 단풍 명소다. 메이플로드의 시작점에 나이아가라폭포가 있다면 종착지엔 몽모랑시폭포가 있다. 웅장함에서는 나이아가라폭포에 한참 못 미치지만, 높이 면에서는 한 수 위다. 나이아가라폭포보다 약 30m 정도 더 높아서 폭포의 낙차가 그만큼 크다. 케이블카를 타고 폭포를 둘러보거나 단풍으로 물든 주변 산책로를 따라 호젓하게 걷기 좋다.
단풍 파노라마를 감상하고 싶을 땐 기차 여행이 답이다. 샤를부아 기차(Train de Charlevoix)는 몽모랑시폭포를 출발해 예술가의 도시 베생폴(Baie-Saint-Paul)을 거쳐 휴양지로 유명한 항구 도시 라말베(La Malbaie)까지 총 125㎞를 달린다. 4시간이 넘는 여정이 살짝 부담스럽다면, 일부 구간만 선택해 즐겨도 좋다. 몽모랑시폭포에서 베생폴 구간은 약 1시간 30분의 짧은 여정이지만, 캐나다의 대자연을 만끽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왼쪽으로는 동화 같은 마을 풍경이, 오른쪽으로는 대서양으로 흐르는 세인트로렌스강이 쉴 새 없이 펼쳐진다. 밝은 다홍부터 짙은 버건디까지 가을 색조를 뒤집어쓴 차창 밖 풍경은 그저 아름답다는 형용사 하나면 충분하다.
사랑에 빠질 준비
도시를 벗어나 순결한 자연의 품 안으로 들어설수록 가을빛은 완연하고 단풍은 농익는다. 퀘벡 사람들이 즐겨 찾는 자크카르티에국립공원(Jacques-Cartier National Park)은 도심에서 차로 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아웃도어 애호가에게 천국 같은 곳이다. 약 100㎞에 달하는 트레일을 따라 하이킹을 즐기거나 강물에 뛰어들어 플라잉 낚시, 카약을 탈 수도 있다. 첩첩산중 계곡을 따라 단풍을 뒤집어쓴 숲과 강이 흐르는 대자연은 평화로움, 그 자체다. 오롯이 쉬고 싶을 땐 볕 잘 드는 곳에 해먹을 걸고 누우면 그뿐이다. 책 한 구절, 풍경 한번 번갈아 음미하다 보면, 깊어가는 퀘벡의 가을이 몸속 혈관을 타고 구석구석으로 번져가는 듯하다.
퀘벡주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몽트랑블랑국립공원은 메이플로드의 정점이라 불리는 로렌시아 고원에 자리한다. 퀘벡 시티와 영혼의 단짝을 이루는 몬트리올에서 차로 1시간 30분이면 붉게 물든 단풍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몽트랑블랑국립공원에 닿는다. 드넓은 산과 숲을 따라 400여 개의 크고 작은 호수가 그려내는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다. 겨울엔 스키어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스테이션 몽트랑블랑(Station Mont-Tremblant)은 가을엔 단풍놀이를 즐기려는 산행객으로 붐빈다. 캐나다 동부 지역 중 가장 고도가 높은 해발 875m 몽트랑블랑 정상에서 감상하는 단풍은 유독 불타오를 듯 선명하다. 스키 리조트에서 출발하는 파노라믹 곤돌라를 타고 15분 남짓 정상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빨간 단풍과 푸른 호수, 아기자기한 마을 풍경이 눈부시게 펼쳐진다. 두 눈으로 누리는 최고의 호사에 감탄이 절로 난다.
퀘벡의 가을은 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보면 볼수록 감탄을 자아내는 대자연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최적의 계절이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 완벽한 피사체 속으로 풀쩍 뛰어들 때다. “I’m Ready to Dive(난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됐어)”,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